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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위력

2012/02/10 09:36

돈의 위력이야 새삼 말해 무엇하겠냐만은,
다만 요즘 아이들은 너무 일찍 그 위력에 압도당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 기억을 더듬어보면,
가난함과 부유함 그리고 돈에 따른 행과 불행을 처음으로 어렴풋이나마 파악한게 대략 예닐곱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계기가 "동화"였다는 것이다.
당시 계몽사에서 명작동화 전집을 성우들의 목소리와 노래로 오디오카세트북을 만들었었다.
그 중 몇개의 테이프가 집에 있었는데, 가장 또렷이 기억나는 것이 "플란다스의 개"이다.
네로가 아로아 아빠한테 엄청 얻어터지고나서 동네 뒷산에 올라 눈내린 마을을 내려다 보며 부르던 노래의 가사가 다음과 같다.
"나는 왜 가난하게 태어났을까? 나는 왜 슬픈 마음 갖고 있을까? 이집도 저집도 행복하게 살겠지.
 아니 아니야. 나는 아니야. 언제까지 착하게 살아 갈거야."
슬펐다.
네로가 결국 얼어죽는 것도 슬펐고,
엄마 아빠가 없는 것도 슬펐다.
그러나 가장 슬픈 것은 부자인 아로아 아빠한테 가난해서 두들겨 맞고 천대당하는 것이었다.
그걸 자조하면서 또 위안하면서 부르는 저 노래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지금 저 가사를 보아도 참...울적하고 슬퍼진다.
매번 울면서도 수없이 들은 저 노래에서 나는 가난하면 행복하지 않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돈의 위력을 알게된 건,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당시 내가 빠져있던 책이 학원 출판사의 에이브전집이었는데, 전체 88권 중 우리집에는 36권밖에 없었다.
그것도 처음에 12권을 사고, 그 다음 24권, 마지막으로 36권. 끝.
전집 중 당시 TV시리즈로도 나왔던 "초원의 집"에 흠뻑 빠져,
그 다음 이야기인 "우리 읍네"까지 꼭 갖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들의 단골 멘트, "돈 없어!"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 진짜 돈이 없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에서 꽤 잘나가는 방직공장을 하던 친구집에 놀러갔다.
(예전 포스팅에 한번 언급한 적 있는 듯...)
딸 다섯인 딸 부자집 막내였는데,
새로 지은 넓은 2층 양옥집에 연못도 있고, 커다란 세퍼트도 한마리 길렀다.
거실은 대리석으로 반짝거렸고, 예닐곱개의 방마다 커다란 침대가 놓여있었다.
우리집이 라면 5개짜리 번들을 사두고 먹는다면, 그 집은 몇 박스가 부엌에 있었다.
속으로는 우와~ 얘네집 진짜 부자구나.. 라고 감탄했지만, 그런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른 것 보다 정말 정말 부러웠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 집 다락방에 방치된 에이브 전집!
먼지 가득 어질러진 다락방 곳곳에는 나의 사랑하는 책들이 언니들의 생리대와 못생긴 인형들과 함께 뒤엉켜있었다.
그 집에 놀러갈 때 마다 그녀와 노는 것보다 그 다락방에 쳐박혀 에이브 전집을 책 번호대로 정리하고 한권씩 읽어가는게 훨씬 더 좋았다.
(물론 그러면 친구는 삐쳐버리고...)
당시 우리집의 통금시간은 6시였고, 나는 조금 더 책을 읽지 못함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어느날 용기를 내었다.
"아무도 이 책은 안 읽나?"
"언니들이 이제 안 읽어서 다락방에 둔거다."
"그럼 니는 이거 다 읽었나?"
"읽은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다락방에는 잘 안간다."
"... 그러면 나 주면 안되?"
책을 읽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사실 더 큰건 책에 대한 소유욕. (예나 지금이나...)
"안되!"
쳇, 읽지도 않고 다락방에서 먼지만 쌓여가는데 왜 안된다는건지 이해가 안되었다.
그러나 더 속상한건 우리집은 돈이 없어 에이브 88권이 없는데,
얘네집은 부자라 이 귀중한 책이 다락방에 처박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돈이 많으면, 돈이 많아서, 부자라서 내가 갖지 못하는 것들을 넘치도록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돈의 힘.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멍청한 아이가 나를 짓누를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자존심 상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나름 조숙하고 자존심 강한 아이었다.)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친구들 중 유난히 눈에 띄게 그 친구가 부자였기에,
내 상처는 그리 깊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즘처럼 빈부격차가 극심한 환경에서 아이들이 받을 상처는
어른들이 감히 상상하지 못할만치 깊고 또 깊을지 모른다.

그냥... 이런 상황에서...
나는 오늘 하루도 무기력하게 빈부격차 증대에 일조했다.
슬프다.


 



2012/02/10 09:36 2012/02/1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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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텔마릴린 2012/02/13 11:27
    M/D R
    그 힘이란 정말로 구석구석 어느 한곳도 미치지 않는곳이 없어요. 부모의 소득수준이 낮은 아이들이 성경험도 빠르고, 비만도 많고, 게임중독 비율도 높고, 영향불균형에, 과일도 많이 못 먹는다잖아요. 에헤. 근데 저 어렸을적엔 여름이면 과일은 정말 배 터지게 먹었거든요? 딸기 따위 고무다라이째로 팔고 막 그랬는데..복숭아도 빠께쓰로 팔구. 농사가 천대당하고 농사지을땅 갈아엎으니 먹는것 마저도 편차가..ㅜ
    • M/D
      그니까... 다 돈이 왠수임.
      생각해보니 나도 대구 근처 과수원으로 놀러가서 딸기따서 배터지게 먹기도 했었네.
      사실 어릴때 과일중에 비싼건 바나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제일 싼게 바나나라는...
      물리적으로 평등해질 수는 없겠지만, 그로 인한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는게 바로 사회시스템일텐데 말이지...
      머리아퍼..
  2. M/D R
    언니는 OO이 꼭 되어서 빈부격차에 일조하지 말고
    나눔의 삶을 꼭 실천할 수 있길 바람.
    매일 밤 자기 전에 마음속으로 기도 ? 염력을 불어넣고 있음.ㅋ
    근데 정말 그 디테일한 기억력에 깜짝깜짝 놀람
    그래서 머릿속이 복잡한 것이 아닐까?ㅋ
    가장 훌륭한 기억은 망각이라던가 ??? 어디서 주워들었는데... 그래서 난 너무 훌륭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풉
    • M/D
      응 꼭 되어야해. 그래야 해..ㅋㅋ
      나 에이브 전집 88권 샀지롱~ 소원성취했다.으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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